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금속 냄새가 났다. 오래된 전철역 3번 출구 앞, 사람들의 발이 가장 빨리 지나가는 모퉁이에 작은 시계수리점이 하나 있었다. 간판에는 바랜 파란 글씨로 정호시계병원이라고 적혀 있었고, 유리문에는 누군가 오래전에 붙였다가 반쯤 떨어진 스티커가 아직 버티고 있었다. “기억도 고쳐드립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문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기억을 어떻게 고친단 말인가. 하지만 그 문장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여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서린은 그 문장을 싫어했다. 너무 감상적이고, 아버지답지 않았다. 아버지 정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웃을 때도 크게 웃지 않았고, 화를 낼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어머니가 대신 웃고, 대신 화내고, 대신..
친구에서 사랑으로 비 오는 골목과 오래된 우산, 그리고 너무 늦은 줄 알았던 마음에 대한 이야기 민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봄, 전학 온 아이가 교실 문 앞에서 가방끈을 꼭 쥐고 서 있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이름을 쓰며 “이도윤”이라고 소개했을 때, 민서는 괜히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공책 귀퉁이에 한 번 더 적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발음이 단단하고도 부드러워서, 비 오는 날 운동장 흙냄새처럼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도윤은 말수가 적었고, 민서는 이상할 만큼 그 아이 앞에서만 말이 많아졌다. 급식 줄에서 “김치 싫어하지?” 하고 묻기도 전에 도윤 식판에서 김치를 자기 쪽으로 옮겨왔고, 체육 시간에 팀이 갈라지면 슬며시 같..
마지막 유산 장례식장 복도는 늘 그렇듯이 소리 없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지나갔고, 화환의 리본은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슬리퍼 끌리는 소리조차 미안해져 발끝으로 걸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괜찮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고는 정말로, 세상에 남은 모든 걱정을 나에게 넘겨준 채 사라졌다. 나는 빈소 한쪽,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구석에 앉아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쥐었다. 방금 전까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이 차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주 완장을 찬 내 팔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이젠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니라는 것이, 그 사실 하나가 내 안에서 매 순간 부딪혔다. 조문객들은 늘 비슷한 말을 했다. “..
사랑이란 사랑이란, 큰 말로 시작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언제나 작은 소리였다. 아주 조용히, 누군가의 하루 속으로 들어가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그래서 그 사람의 숨이 조금 덜 떨리게 만드는 그런 소리. 그날도 나는 조용한 소리를 찾으러 걸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비는 눈과 비 사이 어딘가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물이 되어 떨어졌다. 길모퉁이 꽃집의 비닐 덮개가 바람에 바스락거렸고, 도로 위로 스치는 타이어 소리는 축축한 회색을 더 짙게 만들었다. 나는 우산을 접지 못한 채, 버스정류장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을 처음 보았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상자가 하나 있었다. 두 손으로 꼭 끌어안듯 감싸고, 마치 그 안에 심장이 들어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얼굴은 바람에 닳아 거칠었고, 눈가에는 오래..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오래된 골목의 배수로에는 빗물이 천천히 흘렀고, 그 위를 작은 종이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누구의 손에서 접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에 젖은 종이는 끝까지 모양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디론가 꼭 도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그 종이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말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눌려 있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그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줄어들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작은 종이배 하나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비가 오면 항상 종이배를 접어 주었다. 집..
종이별의 온도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은 늘 비슷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바람 소리가 더 또렷했다. 자동문 밖에서 불어온 찬 공기가 책장 사이를 지나가며 종이 페이지를 아주 살짝 흔들었다. “딸깍.” 책장 끝에 꽂힌 연필 한 자루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비 아저씨가 멀리서 기침을 했고, 안내 방송이 저녁의 끝을 예고했다. 윤서는 도서관 자습실 구석에서 가방을 정리하며 시간을 훔쳐보았다. 시계는 늘 정확했지만, 오늘만큼은 초침이 마음을 건드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 마치 열차가 이미 출발했는데, 플랫폼에 자신만 남은 느낌이었다. 윤서는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세 달째였다. 남들이 보기엔 단정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반듯한 명찰, 정리된 책장,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