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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랑이란
사랑이란, 큰 말로 시작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언제나 작은 소리였다.
아주 조용히, 누군가의 하루 속으로 들어가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그래서 그 사람의 숨이 조금 덜 떨리게 만드는 그런 소리.
그날도 나는 조용한 소리를 찾으러 걸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비는 눈과 비 사이 어딘가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물이 되어 떨어졌다.
길모퉁이 꽃집의 비닐 덮개가 바람에 바스락거렸고, 도로 위로 스치는 타이어 소리는 축축한 회색을 더 짙게 만들었다.
나는 우산을 접지 못한 채, 버스정류장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을 처음 보았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상자가 하나 있었다.
두 손으로 꼭 끌어안듯 감싸고, 마치 그 안에 심장이 들어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얼굴은 바람에 닳아 거칠었고, 눈가에는 오래된 슬픔이 접혀 있었다.
노인은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손등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손등의 주름 사이로 흘러들며 길을 만들 때마다, 그의 눈이 아주 잠깐씩 흔들렸다.
마치 물길을 따라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발을 옮기려 했다.
그때 노인의 상자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났다. “삑.”
전자시계 같은 소리였다.
혹은 알람 같은. 노인은 상자를 더 꽉 안았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품은 사람처럼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자, 나는 잠시 멈춘 채로 웃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내 웃음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처럼 어색했다.
노인은 시선을 돌렸고, 나는 결국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벤치는 비에 젖어 차가웠다. 내 코끝에 젖은 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몇 분이 흘렀다.
버스는 오지 않았고, 정류장 위의 전광판은 “지연”이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무심함을 보여주었다.
노인의 상자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삑.”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마치 숨이 가빠진 사람처럼.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죄송한데… 상자에서 소리가 나네요. 혹시 괜찮으세요?”
노인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비보다 더 많이 내렸다.
그러다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은 게 뭔지… 요즘은 잘 모르겠소.”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찔렀다.
괜찮다는 말은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쉽게 건네는 말이었고, 그래서 자주 거짓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거짓말을 할 힘조차 없는 사람의 진실이 담겨 있었다.
노인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손가락으로 뚜껑의 모서리를 천천히 쓸었다.
그러다 마치 오래된 결심을 뒤늦게 꺼내듯, 상자를 내게 조금 열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작은 기계가 있었다.
손바닥만 한 흰색 기계. 디스플레이에는 숫자가 떠 있었고, 옆에는 가느다란 튜브와 주사기처럼 생긴 것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접힌 종이들이 보였다. 아주 많이. 정성스럽게 접힌 편지들이었다.
나는 기계를 알아봤다. 병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약물을 주입하거나, 상태를 확인하는 장치. 하지만 왜 버스정류장에 이게…
노인은 편지 하나를 꺼냈다. 손끝이 떨렸다. 편지는 누군가의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글씨는 작지만 단정했고, 문장 끝마다 동그랗게 웃는 듯한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이건… 누가 쓰신 거예요?”
노인은 편지를 보며 말했다. “내 사람.”
그 말속의 ‘내’는 소유가 아니었다. 누구도 가둘 수 없는 것을, 다만 끝까지 지키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그는 편지를 다시 접어 상자 안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 집사람이… 떠난 지는 오래됐소. 그런데, 떠나기 전에 나한테 이런 걸 남겼지.”
“이 기계랑… 편지를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나도 몰랐소. 병원에서 설명을 해줬는데도, 나는 머리에 안 들어오더군.
사람이 아프면, 아픈 사람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바보가 되지 않소.
무슨 말을 들어도, 그 말이 그냥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 같아서.”
그는 숨을 고르고, 상자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았다. “집사람은 알았소. 내가 그럴걸. 그래서 편지를 썼지.
하루에 하나씩. 내가 혼자 남아도,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주는 것처럼.”
나는 말문이 막혔다. 편지로 하루를 만든다는 것. 누군가가 없는 날들을, 누군가의 글로 채운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치열한 사랑인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노인은 이어서 말했다. “이 기계는… 내가 약을 제때 맞는지 확인하는 거요.
내 몸이 자꾸 말을 안 듣기 시작했거든. 집사람이 떠나기 직전에 내 병을 알았지.
그리고… 의사가 말했소. 앞으로 혼자 지내면 위험할 거라고.”
그의 눈이 비에 젖었다. 아니, 눈은 젖어 있었지만 그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은 목구멍에서 걸려 넘어졌다.
“집사람이 그랬소. ‘당신, 나 없어도 살아야 해. 내가 허락해.’”
“허락해… 요?”
“응. 허락해. 그 말이 참 이상했는데… 지금은 알겠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남은 사람은 죄인이 되기도 하거든.
웃으면 미안하고, 밥을 먹어도 미안하고, 잠을 자도 미안하고. 살아있는 모든 게 죄 같아져.”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버스가 멀리서 지나갔다. 정류장에 멈추지 않는 버스였다.
그 버스는 젖은 길 위로 검은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노인은 그 흔적을 바라보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오늘 어딜 가는지 아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약속이 있소.”
“누구랑요?”
노인은 상자 안에서 또 다른 편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봉투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3월 2일’.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정류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집사람이 마지막으로 부탁했소. ‘내가 떠난 다음, 매년 이 날엔 여기 와줘. 그리고… 아무한테나 말 걸어줘.’”
“아무한테나요?”
“그래. 아무한테나. 젊은 사람도 좋고, 나이 든 사람도 좋고, 바쁜 사람도 좋고, 슬픈 사람도 좋고. 그냥… 말 한마디.”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왜요?”
노인은 봉투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집사람이 그랬소. ‘당신은 내가 없으면 입을 닫아버릴 거야.
그러면 당신은 점점 사라질 거야. 사람은 말을 잃으면, 마음도 잃거든.’”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된 사진 속의 웃음처럼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결연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이 날 여기 와서 말 걸어. 오늘은… 당신이네.”
나는 무심코 웃었다. “제가… ‘아무나’가 됐네요.”
“그렇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오늘 내 삶을 조금 붙잡아 준 사람이오.”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들려서, 나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따뜻했다.
누군가의 삶을 붙잡는 일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행동이 아니라, 그냥 옆에 앉아주고,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노인은 편지를 열지 않았다. 대신 봉투를 내게 건넸다. “읽어주겠소?”
“제가요?”
“나는… 오늘은 목소리가 잘 안 나와.” 그는 웃으며 목을 만졌다. “비 오는 날엔 특히 그렇소. 집사람이 대신 읽어달라고 할 때가 있거든.”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았다. 종이는 비에 젖지 않도록 두 겹으로 싸여 있었다.
봉투를 열자, 안에서 얇은 편지 한 장이 나왔다. 글씨는 선명했다. 마치 방금 적은 것처럼.
나는 숨을 들이켜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당신. 오늘도 정류장에 왔지? 비가 오면, 당신은 분명 우산을 챙기지 않았을 거야. 늘 그랬으니까.
나는 당신이 우산 없이도 잘 걸어가길 바라. 비를 맞는 게 멋있어서가 아니라, 비를 맞아도 당신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서.’”
노인의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는 동안, 상자를 가슴에 대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그 상자 안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처럼.
나는 편지를 계속 읽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오늘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줘. 아주 짧아도 돼. “춥네요”도 좋고, “버스 늦네요”도 좋아.
그 사람의 하루에 당신의 목소리를 조금 섞어줘. 그러면 당신의 하루에도 그 사람의 숨이 섞일 거야.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살려.’”
내 목이 조금 메었다. 나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가락이 상자의 뚜껑을 아주 천천히 두드렸다. “톡. 톡.” 기계의 “삑” 소리와 섞여 이상한 리듬을 만들었다.
그 리듬은,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법 같았다.
나는 다시 읽었다.
“‘사랑이란 말이 너무 크면, 당신은 겁을 먹지. 그래서 나는 사랑을 다른 말로 남길게.
사랑은… 당신이 내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야. 사랑은, 당신이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야.’”
노인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그 떨림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편지의 마지막을 천천히 읽었다.
“‘당신, 살아. 그리고 가끔은 웃어. 내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당신이 웃으면 나는 어딘가에서 괜찮아질 거야.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 그러니 당신도 당신을 사랑해. 그게 내가 당신에게 남긴 마지막 숙제야.’”
내가 읽기를 마치자, 정류장 안에 비 소리만 남았다. 노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봉투를 노인의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봉투를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다. “고맙소.”
“제가… 뭘요.”
“내 사람 목소리를 빌려줬잖소.”
그 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순간 눈을 깜빡이는 걸 잊었다. 목소리를 빌려준다.
그건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도록 잠깐 길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노인은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당신은… 요즘 괜찮소?”
그 질문은 처음과 달랐다. 그냥 인사로 던지는 괜찮냐가 아니었다.
정말로, 내 하루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상하게도 솔직해지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왜 이렇게… 뭐든 빨리 지나가는데, 마음은 안 따라가는 것 같아요. 사람들 속에 있어도 혼자 같고, 혼자 있으면 더 무서워요.”
말을 꺼내는 순간, 내 안에 있던 무게가 조금 움직였다. 노인은 내 말을 끊지 않았다.
다만 듣는 얼굴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이상한 위로였다.
해결책을 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 말을 끝까지 듣는다는 사실이.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 사람은 늘 그랬소. ‘마음이 안 따라오면, 기다려주면 돼.’”
“기다려요?”
“응. 마음은 느리거든. 몸보다, 시간보다, 말보다. 그래서 마음이 오는 길엔 늘 비가 오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길이 미끄럽기도 하지.”
그는 내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결국 오더군. 늦게, 아주 늦게. 나는 내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한참 뒤에야 알았소.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사랑은 뭘까요?”
노인은 잠시 하늘을 봤다. 비가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그 빛을 손바닥에 받아보려는 사람처럼 손을 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은… 내가 없어도 네가 너를 버리지 않게 하는 것.”
그 말은 내 안에서 천천히 울렸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옆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는 것.
내가 길을 잃어도, 내가 나를 미워하려 할 때에도, ‘너는 여기 있어’라고 알려주는 것.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다시 “삑” 소리가 났다. 노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계를 확인했다.
숫자가 바뀌었고, 그는 튜브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됐네.”
“약… 맞으셔야 해요?”
“그래.” 그는 상자를 열고, 바늘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떨렸다. 평소보다 더.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노인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계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허락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줄 수 있겠소?”
나는 의료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손은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할 줄은 알았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그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디를 닦고, 어떻게 숨을 고르고,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나는 그의 말을 정확히 들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종종 이렇게 배우는 것이라는 걸. 누군가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사람이 살아갈 방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
약이 주입되자 기계는 조용해졌다. 노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당신 덕분에 오늘은… 좀 더 괜찮아졌소.”
나는 웃었다. “저도요.”
그때 버스가 멀리서 다가왔다. 이번엔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였다. 전광판의 “지연”이 사라지고, 도착 안내가 떴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사람 몇 명이 내렸고, 몇 명이 탔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났다. 상자를 들고 버스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느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추고 내게 돌아섰다.
“당신 이름이 뭐요?”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약속을 새로 쓰듯, 아주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람에게 오늘 보고하겠소. ‘오늘은 네가 시킨 숙제 잘했어.
그리고 네 말대로… 사람은 서로를 살리더군.’”
나는 가슴이 뜨거워져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은 버스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손을 들어 아주 작게 흔들었다. 그 손짓은 작았지만, 내 하루를 바꿀 만큼 컸다.
버스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정류장에 서 있었다. 비는 거의 그쳤고, 하늘은 조금씩 밝아졌다.
젖은 길 위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겹쳐져 있었다.
모두 다른 방향으로 가는 발자국들이었지만, 순간순간 한 지점에서 겹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삶과 누군가의 삶이 잠깐 만나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헤어지는 것처럼.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함에는 읽지 않은 대화들이 있었고, 해야 할 일 목록은 길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일을 하고 싶었다. 정말 작은 일.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
나는 카페로 들어갔다. 바리스타가 “주문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습관처럼 “아메리카노요”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다른 말을 했다.
“오늘 비 오는데… 따뜻한 거 마시면 좀 괜찮아지죠?”
바리스타가 잠깐 놀란 듯하다가 웃었다. “그럼요. 오늘 같은 날은 특히요.”
그 웃음이, 내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은 불을 붙였다. 나는 컵을 받아 들고 창가에 앉았다.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어떤 사람은 우산을 접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우산을 폈다.
어떤 사람은 혼자였고, 어떤 사람은 둘이었다. 그들의 삶은 서로 달랐지만, 비를 피하려는 마음만큼은 비슷해 보였다.
나는 그 노인의 상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당신도 당신을 사랑해.’
그 문장이 내게도 필요하다는 걸,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크게 말하지 않고, 다만 마음속에서 조용히.
‘나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며칠 뒤, 나는 다시 그 정류장에 갔다. 날짜는 3월 2일이 아니었지만, 그곳에 한 번 더 가보고 싶었다.
혹시 노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날 정류장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커플, 택배 상자를 든 아저씨, 졸린 얼굴의 학생. 그들 사이에 노인은 없었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학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버스… 자주 늦네요.”
학생이 이어폰을 한쪽 빼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맨날 이래요.”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가슴이 덜 무거웠다.
마치 내 안의 숨이 누군가의 숨과 잠깐 섞였다가, 다시 나를 살려 돌려주는 것처럼.
그때 나는 알았다. 노인의 ‘약속’은 특정한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약속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떠나며 남긴 사랑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건너가도록 하는 약속. 그 약속은 거창하지 않았다.
“춥네요.” “버스 늦네요.” “오늘은 좀 괜찮아질까요?” 그런 말들로 이어지는 약속.
그리고 나는 또 하나를 알았다. 내가 그 노인에게 ‘아무나’였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아무나’가 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붙잡아 주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잠깐 옆자리에 앉아주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래 연락하지 못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요즘 어때? 그냥… 생각나서.”
상대는 한참 뒤에 답장을 보냈다. “나 사실 좀 힘들었어. 근데 너 메시지 보니까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흘려보냈다. 울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일 때가 있으니까.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나도 완벽하진 않은데, 네 얘기 들을 수는 있어.”
그 순간, 사랑은 내게 어떤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동작이 되었다. 문장을 보내는 손가락의 움직임.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한 발 내딛는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늦게라도 따라오도록 기다려주는 움직임.
나는 아직도 사랑을 완벽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안다.
사랑은 누군가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것.
사랑은 사라진 뒤에도 남아서, 남은 사람이 살아갈 이유를 배우게 하는 것. 사랑은 “미안해하지 말고 살아”라고 말해주는 것.
그리고 사랑은, 이름 모르는 사람끼리도 잠깐 서로를 살려낼 수 있다는 믿음.
비가 그친 뒤의 하늘처럼, 사랑은 늘 맑지 않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나면, 길 위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남는다.
젖은 흔적과 반짝임, 그리고 서로가 지나간 자리. 그 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된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며도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결심이 누군가에게 건너가, 또 다른 결심을 낳는 것.
어쩌면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세상을 가장 크게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