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감동 단편 종이배 관련 사진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오래된 골목의 배수로에는 빗물이 천천히 흘렀고, 그 위를 작은 종이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누구의 손에서 접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에 젖은 종이는 끝까지 모양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디론가 꼭 도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그 종이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말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눌려 있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그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줄어들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작은 종이배 하나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비가 오면 항상 종이배를 접어 주었다.

     

    집 앞 개울에 함께 나가 종이배를 띄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종이배는 결국 젖어서 가라앉지만, 떠 있는 동안은 어디든 갈 수 있단다.”

     

    어린 준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종이배가 멀어질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던 기억만은 또렷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는 종이배를 한 번도 접어본 적이 없었다.

     

    바쁘게 살아야 했고, 현실은 종이배 같은 것에 시간을 쓰기엔 너무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렇게 그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새 웃는 법도 잊어버렸다.

     

    빗물이 고인 길 위에서 종이배는 잠시 돌에 걸려 멈췄다.

     

    준호는 무심코 허리를 숙여 그것을 다시 물길 위로 밀어주었다.

     

    손끝에 닿은 종이는 이미 축축했고, 조금만 더 지나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거 제 거예요.”

     

    돌아보니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운동화, 손에는 공책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네가 만든 거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병원에 있어서요. 심심해서 만들었어요.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요.”

     

    아이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이 쉽게 알아채는 종류의 외로움이 있었다.

     

    준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금방 나아요?”

     

    “모르겠어요. 근데 엄마가 그랬어요. 기다리는 동안 슬퍼하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아이는 다시 종이배를 바라봤다.

     

    빗물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를 보며, 마치 누군가의 안부를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준호는 갑자기 오래전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떠 있는 동안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다. 결국 가라앉는다는 사실보다, 떠 있는 순간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을지도 몰랐다.

     

    “같이 하나 더 만들까?”

     

    그가 말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그 웃음은 비를 맞고도 사라지지 않는 밝음이었다.

     

    둘은 편의점 앞 처마 밑에 앉아 종이배를 접었다. 서툰 손놀림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종이를 접고 또 접는 동안, 준호는 자신이 오랫동안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매달리느라, 살아가는 순간 자체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만든 종이배 두 개가 물 위에 떠올랐다. 하나는 아이의 것이었고, 하나는 준호의 것이었다.

     

    두 배는 나란히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서로 멀어졌다.

     

    “왜 떨어져요?” 아이가 물었다.

     

    “물길이 다르니까.”

     

    준호는 대답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그 말이 꼭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결국 함께할 수 없는 순간도 온다.

     

    하지만 잠시라도 같은 물 위에 떠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는 점점 잦아들었다. 아이는 병원 쪽으로 뛰어갔고, 준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종이배는 점점 작아지다가 골목 끝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종이배를 접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창가에 놓인 종이배를 바라보며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삶은 이미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고, 그 위에 자신도 떠 있을 수 있었다.

     

    종이배처럼 언젠가는 멈추겠지만, 그때까지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며칠 뒤, 준호는 병원 앞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났고,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퇴원했어요.”

     

    그 말 한마디에 준호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는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그날 이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준호는 종이배를 하나씩 접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 덜 외롭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종이배는 대부분 금세 젖어 사라졌지만, 그는 더 이상 그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라진다는 사실이, 그 순간의 가치를 없애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늦은 밤, 창밖으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준호는 창문을 열고 종이배를 물길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종이배는 흔들리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가라.”

     

    그 말은 종이배에게 하는 인사이기도 했고, 지나온 시간에게 보내는 작별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흘러갈 자신의 삶을 향한 작은 응원이었다.

     

    종이배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어떤 것들은 붙잡지 않을 때 비로소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세상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종이배를 접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종이배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종이배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 위에서는 잠시뿐이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오래, 아주 오래 떠다니고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