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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서 사랑으로
“퇴근 시간 맞춰 오려했는데, 버스가 막히더라.”
민서는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말도 없이 왜 왔어?”
도윤이 웃었다. “네가 오늘 힘들다고 했잖아.”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하루를 기억하고, 힘든 날의 톤을 기억하고, 거기에 맞춰 우산 하나를 들고 오는 마음.
민서는 집에 돌아와 젖은 코트를 벗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런 건 친구가 해주는 일일까. 아니면, 친구라서 가능한 일일까. 질문은 비슷했지만 답은 전혀 달랐다.
도윤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도면은 늘 수정되었고, 일정은 항상 촉박했으며, 사람들은 그가 침착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는 웬만해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민서에게서 “괜찮아”라는 메시지가 올 때마다 그는 꼭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민서의 괜찮아는 보통 괜찮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언어를 십오 년 동안 배워왔다.
도윤에게 민서는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좋은 식당을 발견하면 같이 오고 싶었고, 웃긴 영상을 보면 공유 버튼부터 눌렀다.
아플 때 생각나는 사람, 기쁜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 사람, 길을 걷다 간판 글씨 하나를 봐도 떠오르는 사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감정이 우정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선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금 가진 것을 잃을까 봐 겁이 났다.
사람들은 흔히 고백을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윤에게 용기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었다.
민서가 연애 상담을 해올 때도, 다른 사람과 잘해보려 한다며 사진을 보여줄 때도, 그는 최대한 솔직한 친구처럼 굴었다.
“이 사람은 네가 웃는 걸 좋아하는 것 같네.” 같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비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봄, 민서가 짧은 연애를 끝내고 도윤을 불러냈다.
둘은 대학가 뒷골목의 허름한 국숫집에 마주 앉았다.
민서는 젓가락으로 면을 몇 번 들었다 놓더니 말했다.
“이번엔 진짜 괜찮을 줄 알았어.” 도윤은 물컵을 민서 쪽으로 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의 말은 많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민서 눈가가 조금 붉었다.
“나 왜 자꾸 비슷한 사람만 만날까?”
“어떤 사람이 비슷한데?”
민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굴다가, 결국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윤은 손끝이 저릿해졌다.
나는 너를 안다고, 누구보다 오래 봐 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슬플 때 웃는 척하는 표정도,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것도, 감기 걸리면 목부터 쉬는 것도 안다고.
그런데 그 모든 말을 꺼내는 건, 그 자리에서 친구를 잃을 수도 있는 칼날 같은 일이었다.
그는 결국 평소처럼 말했다. “다음 사람은 다를 거야.” 그리고 집에 돌아가 혼자 한참 후회했다.
시간은 눈치 없이 흘렀다. 민서는 팀장이 되었고, 도윤은 프로젝트 책임을 맡았다.
둘 다 어른이 되어갔고, 그래서인지 오히려 함께 있는 시간은 더 편해졌다.
누군가는 관계가 오래될수록 둔해진다고 했지만, 그들의 사이는 반대였다.
무심히 내민 휴지, 목소리만 듣고 알아차리는 피곤함, 짧은 침묵의 뜻까지 자연스럽게 읽혔다.
편안함은 깊이의 다른 이름이었다.
문제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바닥에 가라앉은 마음도 선명해진다는 점이었다.
그해 여름, 민서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다행히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입원이 길어졌다.
민서는 병원과 회사 사이를 오가며 기진맥진했고, 평소처럼 씩씩하게 굴 힘이 없었다.
새벽 두 시에 복도 의자에 앉아 울다가,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은 도윤이었다.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두 번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민서야?”
그 한마디에 민서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도윤은 급히 묻지도 않았다.
어디 병원인지, 몇 층인지, 필요한 게 있는지만 짧게 확인하고는 “가고 있어”라고 말했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어 병원 로비에 도착한 도윤은 한 손에 따뜻한 물, 다른 손에 얇은 담요를 들고 있었다.
그는 민서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담요를 덮어줬다.
민서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덜 무너질 수 있는지. 도윤의 셔츠 소매는 구겨져 있었고, 머리는 급히 나와서인지 한쪽이 눌려 있었다.
민서는 울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너 지금 되게 이상해.”
그러자 도윤은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더 이상해. 울면서 웃고.”
그날 이후 도윤은 거의 매일 병원에 들렀다.
민서가 못 먹은 저녁을 챙겨 오고, 병실 보호자 의자 대신 잠깐 눈 붙일 수 있게 차에서 담요를 가져오고, 행정 절차가 복잡할 때는 대신 확인해 주었다.
민서는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너무 가벼워 보였다.
고마움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자꾸 가슴 안쪽에서 부풀었다.
어느 저녁, 병원 옥상에서 둘이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노을이 도시 위에 얇게 퍼져 있었고, 헬기장 바닥 선들이 붉게 물들었다.
민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윤을 바라봤다.
도윤은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옆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그래서 더 낯설었다.
오래 본 사람인데 처음 보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도윤아.”
“응.”
“넌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도윤은 질문을 듣고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라면 국물만 바라봤다.
민서는 장난처럼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 질문 뒤에는 ‘친구라서?’와 ‘그 이상이라서?’가 동시에 숨어 있었다.
도윤은 결국 낮게 말했다. “그냥… 네가 힘든 걸 못 보겠어.”
평소 같으면 민서는 “오글거린다” 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그녀는 더 묻지 못했다.
묻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문이 열릴 것 같았다.
둘은 라면을 다 먹고도 한참 옥상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서늘해졌고, 말 대신 침묵이 길어졌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평온하지도 않았다.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의 공기 같았다.
어머니가 퇴원한 뒤 민서는 오랜만에 집에서 혼자 잠을 잤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며 지난 몇 달을 떠올리다가, 새벽에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도윤에게 기대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힘든 일이 있을 때 연락하는 수준이 아니라, 좋은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말하고 싶고, 맛있는 걸 먹으면 떠오르고, 문득 조용한 밤이 오면 보고 싶었다.
그건 우정이 자라는 모습이 아니라, 우정의 모양을 한 사랑이 천천히 이름을 얻는 과정이었다.
깨달음은 늘 사람을 용감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민서는 그 후로 도윤 앞에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괜히 연락 텀을 길게 두고, 답장이 오면 바로 읽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는 작은 어긋남도 금방 눈치챘다.
“무슨 일 있어?” 도윤이 물었을 때, 민서는 “없어”라고 답했다.
“너 요즘 ‘없어’가 너무 많아.”
민서는 모니터를 보다가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도윤의 메시지는 짧았지만 정확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도윤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봐 겁났기 때문이다.
사랑이 되기 전의 우정은 안전하지만, 사랑이 되어버린 우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민서는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미뤘다.
그 사이 계절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첫눈이 온 날, 도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어?” 민서는 망설이다가 알겠다고 했다.
둘은 예전처럼 학교 앞이 아닌, 회사와 회사 사이 중간쯤 있는 작은 공원에서 만났다.
벤치 위에는 눈이 얇게 쌓여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눈발을 느리게 보이게 했다.
도윤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다음 달에 부산 내려가.”
민서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출장?”
“아니. 발령. 최소 2년.”
민서는 웃어 보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언제 말하려고 했어?”
“확정이 늦었어. 나도 며칠 전에 들었고.”
말은 담담했지만 도윤 손등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민서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도윤에게 라기보다,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친구’라는 이름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축하해야 하는지, 붙잡아야 하는지, 아무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겨우 말했다. “잘됐네. 네가 원하던 프로젝트잖아.”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응. 그런데… 이상하게 기쁘기만 하진 않더라.”
눈발이 조금 세졌다.
민서는 도윤의 코트 깃에 내려앉는 눈을 보며 손끝을 꽉 쥐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못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서야, 나 네가 나 피하는 거 알았어.”
민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고, 나중엔… 그냥 네가 힘들어서 그런가 했어.
근데 부산 얘기 듣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너였어.
네가 나 없이도 잘 지낼 거란 걸 아는데도, 자꾸 마음이 걸렸어.”
도윤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 “나 사실 오래전부터 너 좋아했어.”
민서의 귀에서는 그 뒤의 눈소리까지 크게 들렸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였는지, 고등학교 때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정신 차려 보니까 늘 그랬어.
근데 말하면 네가 불편해할까 봐, 친구라도 잃을까 봐 못 말했어.
너 힘들 때 옆에 있어주면서도 아무 말 못 한 거, 비겁한 거 알아.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솔직해지고 싶었어.”
민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고, 동시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먼저 나온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혼자만 이상해진 게 아니었구나.
혼자서만 우정을 망가뜨리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왜 울어?” 도윤이 당황해 묻자, 민서는 웃으면서 울었다.
“나도… 너 좋아해.”
도윤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늘 차분하던 얼굴이 믿기지 않는 사람처럼 변했다. “뭐?”
민서는 눈물 닦을 새도 없이 말했다. “나도 좋아한다고. 그래서 피했어.
네가 그냥 친구면 어떡하지 싶어서. 내가 괜히 선 넘는 거면 어떡하지 싶어서. 너 부산 간다니까 더 무서워졌어.”
도윤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오래된 예의가 몸에 밴 사람답게, 허락 없이 가까워지지 못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민서는 그 망설임이 너무 도윤답고, 그래서 더 애틋해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닿자, 도윤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감싸왔다.
그 순간 민서는 깨달았다.
사랑은 갑자기 시작되는 폭죽이 아니라, 오래 켜져 있던 작은 불을 서로 확인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것을.
둘의 연애는 시작부터 거창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였을 때와 닮아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착하면 연락해”라는 말에 “왜 이렇게 걱정해” 대신 “응, 네가 걱정할까 봐 바로 할게”라고 답할 수 있었고, 헤어질 때 손을 잡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오래된 우정이 바탕이 된 사랑은 새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집의 방문 하나를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물론 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도윤의 부산 발령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둘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해야 했다.
서울역 플랫폼에서 기차가 출발하기 전, 민서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제 시작했는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
도윤은 창문 너머로 손을 맞대며 대답했다. “친구로 버틴 시간이 몇 년인데,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그 말에 민서는 웃다가 또 울었다.
도윤은 늘 그렇게, 민서를 울리고 웃게 했다.
부산과 서울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길고, 생각보다 짧았다.
길다는 건 보고 싶은 날마다 볼 수 없다는 뜻이었고, 짧다는 건 마음이 정해진 사람에게 2시간 반쯤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주말이면 새벽 기차를 탔고, 민서는 역에 나가 따뜻한 커피를 들고 기다렸다.
둘은 만나는 시간보다 헤어지는 시간을 더 자주 견뎌야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느꼈다.
어느 날 민서가 회사에서 큰 실수를 했다.
퇴근 후 아무 말도 하기 싫어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누워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도윤이 서 있었다. “오늘 회의 망했다고 했잖아.” 그는 야근하고 바로 KTX를 탔다고 했다.
민서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너 미쳤어?”
도윤은 신발도 안 벗고 현관에 서서 말했다. “응, 네 일에는 좀.” 그날 민서는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웃다가 결국 울었다.
도윤은 늘 중요한 순간마다 정답보다 진심을 먼저 가져왔다.
반대로 도윤이 힘들 때는 민서가 내려갔다.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팀 분위기가 무너진 날, 민서는 주말도 아닌 평일에 연차를 내고 부산으로 갔다.
둘은 광안리 바닷가를 한참 걸었다.
도윤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나 진짜 못할까 봐 겁난다.”
민서는 그의 걸음을 맞추며 대답했다. “너는 못할 사람이 아니라, 너무 책임감이 커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이야.”
도윤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힘보다,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버티게 하는 힘에 가까웠다.
1년쯤 지나자 주변 사람들도 둘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진작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민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억울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쉽게 몰랐으니까. 우정과 사랑은 멀리서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천천히 섞여드는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의 마음도 그랬다. 이름 붙이기 전부터 이미 사랑이었고, 이름을 붙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마음들이 있었다.
부산 발령이 끝나갈 무렵, 도윤은 서울 복귀가 거의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바로 민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대신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민서를 처음 우산 들고 기다리던 그 정류장 앞으로 불렀다.
계절은 또 겨울이었고, 이번에도 눈이 비로 바뀌고 있었다. 민서는 도윤을 보자마자 웃었다. “왜 이렇게 의미 있는 장소만 골라?”
도윤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지 상자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만년필 케이스를 닮은 납작한 상자였다.
민서가 열어보니 안에는 낡은 연필 하나와 새 연필 하나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민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봤다.
“기억나?” 도윤이 물었다. “초등학교 때 네가 나 첫날에 연필 빌려줬잖아.
그때 내가 돌려준다고 하고 결국 못 돌려준 거. 집 정리하다 찾았어.”
민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랗게 닳은 연필에는 어린 시절 이를 깨문 자국 같은 흠집이 있었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지나온 시간 전체를 데려오는 것 같았다.
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친구였던 시간이 길어서 좋아.
그 시간 덕분에 지금 내가 너를 얼마나 잘 아는지도, 얼마나 아끼는지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앞으로는 친구였던 시간만큼, 연인으로도 오래가고 싶어.”
비가 우산 끝에서 한 줄씩 떨어졌다.
도윤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민서야, 나랑 결혼할래?”
민서는 대답 대신 먼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도윤은 그런 민서를 보며 따라 웃었다.
오래전 병원 복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울면서 웃는 얼굴이었다.
민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말했다. “너는 진짜 중요한 말 할 때 꼭 나 울게 만든다.”
“그럼… 싫다는 거야?”
민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좋아서 우는 거야.”
그리고 숨을 고른 뒤, 또렷하게 말했다. “응. 할래.”
도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민서를 끌어안았다.
민서는 젖은 코트 냄새와 익숙한 체온 속에서 눈을 감았다.
놀랍게도 그 품은 낯설지 않았다.
처음 안겨보는 사람의 품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자리 같았다.
아마 사랑이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처음인데 오래된 것, 오래됐는데도 처음처럼 떨리는 것.
결혼 준비를 하면서 둘은 종종 친구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렇게 오래 말하지 못했는지.
결론은 늘 비슷했다.
정확한 시작점은 알 수 없다는 것. 다만 분명한 건, 서로의 일상 가장자리마다 이미 오래전부터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밤, 병원 복도에 앉아 있던 새벽, 답장 하나에 웃고 울던 수많은 날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그런 순간들이 모여 스스로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민서는 청첩장 문구를 고르다가 한 줄을 따로 적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와 가장 새로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도윤은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민서가 “별로야?” 하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너무 우리 같아서.”
결혼식 날, 축사를 맡은 대학 친구는 예상대로 말했다. “이 둘은요, 주변 사람들 다 아는데 본인들만 늦게 알았던 커플입니다.”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민서와 도윤도 함께 웃었다.
민서는 꽃을 들고 서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몇 년 전의 자신에게 이 장면을 보여줬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으면서도 무서워했을 것이다.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쁜 만큼 겁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민서는 안다.
좋은 우정은 사랑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오래 버틸 수 있게 받쳐주는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서로를 잘 아는 시간은 설렘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이 사라질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자리, 신뢰의 바닥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화려한 말보다, “밥 먹었어?”, “집 도착하면 연락해”, “오늘 좀 피곤해 보인다” 같은 문장들로 더 단단해졌다.
결혼 후 첫 겨울밤, 민서는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국 냄새가 났고, 거실 소파에는 도윤이 졸다가 깬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왔어? 많이 늦었네.” 민서는 코트를 벗으며 웃었다.
“말도 없이 왜 안 자고 기다려?” 도윤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오늘 힘들다고 했잖아.”
민서는 순간 멈춰 섰다.
수년 전 비 오는 정류장 앞에서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관계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문장을 건네는 사람과 그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서는 조용히 도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도윤이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도윤아.”
“응.”
“우리, 친구여서 정말 다행이다.”
도윤은 잠깐 웃더니 대답했다. “응.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라서 더 다행.”
창밖에는 비와 눈의 경계 같은 싸락눈이 부서지듯 내리고 있었다.
민서는 따뜻한 집 안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떤 사랑은 불꽃처럼 시작해도 금방 사라지고, 어떤 사랑은 너무 오래 곁에 있어서 뒤늦게야 알아차린다.
그러나 늦게 알았다고 늦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 있어서, 그 사랑은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날 밤 민서는 잠들기 전 도윤의 손을 꼭 잡았다.
친구였던 날들의 시간과, 이제 연인으로, 부부로 살아갈 시간들이 한 손안에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의 온기는 놀랍도록 익숙했고, 그 익숙함 속에서 심장은 여전히 조금 빠르게 뛰었다.
민서는 눈을 감으며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가장 좋은 사랑은, 결국 가장 깊은 우정 위에 피어나는 꽃일지도 모른다고.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