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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늘 같은 속도로 같은 길을 달렸다.
창밖엔 비가 왔고, 비는 유리 위를 미끄러지며 자꾸만 풍경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냈다.
사람들은 비 때문에 우산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버스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비 오는 날 특유의 정직한 냄새가 있었다. 젖은 옷, 따뜻한 히터 바람, 조금 눅눅한 사람의 숨.
그 사이에 끼어 있던 나는, 다른 날처럼 그냥 회사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맨 뒤 좌석 한 칸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손은 느렸고, 손끝은 부드럽게 떨렸다.
누군가의 서둘러야 하는 하루와는 다른 속도였다.
할머니는 그 종이를 펴더니 다시 접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창문에 기대어 있었지만, 눈은 자꾸 그 손을 따라갔다.
종이는 별이 됐다. 정확히는, 별 모양을 닮은 작은 ‘방향’ 같은 것이 됐다.
할머니는 별을 한 번 쥐었다가, 살짝 펼쳐 보였다.
그리고 다시 접었다.
마치 별이 그 손바닥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접혔다 폈다 했다.
그 과정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더 오래 붙잡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는… 오늘도 많이 바쁘지?” 나는 놀라서 잠깐 멈칫했다.
눈을 피하려다 오히려 더 민망해져서, 그냥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일요.” 할머니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더니, 별을 하나 더 접기 시작했다.
“바쁜 게 나쁜 건 아닌데… 바쁘면, 마음이 길을 잃더라.” 할머니가 ‘마음’이라는 말을 할 때, 마치 그 단어가 손바닥에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요? 저는… 길을 잃을 겨를도 없는데요.”
할머니는 작게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 이미 한 번 다 겪어 본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길을 잃는 거야. 잃었다는 것도 모르고.” 버스가 정류장에 한 번 크게 흔들리며 멈췄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우르르 탔다. 그 사이에도 할머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종이는 하나, 둘, 셋… 작은 별이 되어 무릎 위에 차곡차곡 놓였다. 별은 종이였고, 종이는 흔했는데, 그 별들이 쌓일수록 이상하게 귀해 보였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거… 누가 드리려고 접으세요?”
할머니는 잠시 손을 멈추고, 별 하나를 손끝으로 굴렸다.
“우리 손자.” “손자요?” “응. 매일 학교 갈 때 주려고.” 나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별 하나로 뭘 하겠다는 걸까. 그런데 그 표정에서 ‘그게 중요한가’ 같은 질문을 삼키게 됐다.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었다. “손자분이 좋아하나 봐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한 적도 있고, 싫어한 적도 있지.” 그 말에 왠지 마음이 찔렸다.
좋아했다가 싫어하게 되는 건, 대개 별 때문이 아니라 별을 주는 사람 때문이니까.
할머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원래는 좋아했어. ‘할머니 최고’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안 받더라.
애들도 크면 부끄럽다나 뭐라나.” “그럼 왜 계속 접으세요?”
내 질문이 조금 무례했을 수도 있는데, 할머니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별 하나를 내 쪽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럼에도… 계속 해야 하는 날이 있어.”
나는 별을 받지 못하고, 손만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별을 조심히 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종이가 가벼워서,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작은 종이의 무게가 마음에는 묵직했다.
“계속 해야 하는 날이요?” 할머니는 창밖을 봤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하루에 방향이 되어주는 날이 있어. 별처럼.” 나는 별을 바라봤다.
별은 방향을 알려 준다. 밤에 길을 잃지 않게, 아주 멀리서라도 어딘가를 가리켜준다.
그런데 별은 늘 빛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고개를 들 때만 보인다.
할머니는 별을 또 하나 접고, 또 하나 접었다.
손바닥에 작은 별들이 늘어날수록, 그 별들은 마치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방법’처럼 보였다.
버스는 강을 건넜다. 회색 강물 위로 비가 떨어지고, 물결은 금세 지워졌다.
흔적이 남지 않는 풍경이었다. “손자분이… 힘든가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왜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다.
별을 주는 건 ‘좋아해 달라’가 아니라 ‘괜찮아지길’에 가까웠다.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즘 애들 말로… ‘멘탈’이 나갔다나.”
할머니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버스 안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할머니는 어색한 듯 웃었다. “애들이 쓰는 말은 어렵더라. 근데 뜻은 알겠어. 마음이 다친 거지.” “무슨 일 있었대요?”
할머니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별 하나를 더 접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헤어졌거든.” 그 말은 버스 안에서 크게 울리지 않았는데, 내 가슴 안에서는 크게 울렸다.
나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애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느껴. 말은 안 해도.” 할머니는 별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그 별의 꼭짓점을 살짝 눌렀다.
마치 상처에 약을 바르듯. “손자가 나한테 그랬어. ‘할머니, 나 때문에 싸웠어?’” 나는 숨이 잠깐 막혔다.
그 질문은 아이가 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할머니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내가 별을 접어. 말로는… 다 못하겠더라.” “왜요?” 할머니가 잠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오래된 마음의 결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말은 가끔… 칼이 되거든.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애한테는 칼이 될까 봐.” 나는 별을 손끝으로 만졌다.
종이의 모서리가 살짝 날카롭다. 종이별도, 잘못 쥐면 손을 베인다. “그래서 별을 줘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은… 칼이 아니잖아. 별은 방향이지.”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췄다.
할머니는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별을 한 번 더 접고, 내 무릎 위에 또 하나를 올려두었다. “이건… 젊은이 거.” “저요?” 나는 당황했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도 아니고, 단지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사람일 뿐인데.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젊은이도 바쁘다 했잖아. 바쁘면… 마음이 길을 잃는다 했고.”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그 말은 습관처럼 나왔다.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말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할머니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괜찮은 사람은… 괜찮다고 말 안 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우산을 챙겼다. 문이 열리고, 비가 버스 안으로 잠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할머니는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쪽을 향해 말했다. “별을 보면,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어. 길은… 고개 든 사람한테 더 잘 보이더라.”
그리고 할머니는 비 속으로 사라졌다. --- 그날 나는 회사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탔고, 평소처럼 인사를 했다. 평소처럼 이메일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회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이 자꾸만 무릎에 갔다. 주머니 속에서 종이별 두 개가 부딪히는 느낌이 났다.
그 작은 종이들이 내 하루를 방해했다. 정확히는… 내 하루에 ‘틈’을 만들었다. 점심시간, 나는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흐렸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고,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웅웅거렸다. 나는 종이별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놓으니, 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별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별은 칼이 아니라 방향이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요즘 나는 엄마 전화를 자주 놓쳤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늘 1초가 길었다.
그런데 그날은 버튼을 눌렀다. “엄마.” “밥은 먹었어?”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대단한 위로도 아니고, 거창한 조언도 아니고, 그냥 밥 먹었냐는 말인데… 그 말이 내 마음의 방향을 약간 돌려 놓았다.
나는 짧게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말이 바뀌었다. “엄마… 나 요즘 좀… 힘든 것 같아.” 말이 나와 버렸다.
내 입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고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좋았다.
내 말을 자르지 않는 침묵. 엄마는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그래. 힘들었구나.” 그 한 문장에, 내 목이 뜨거워졌다.
왜냐하면 그 말은 ‘왜’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힘드냐고 따지지 않고, 왜 그러냐고 분석하지 않고, 그냥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나는 옥상 난간에 기대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흐린 하늘이 조금 높아 보였다.
“엄마… 나 주말에… 집 갈게.” 그 말을 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주말은 늘 쉬어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가는 시간도 ‘쉬는 시간’일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종이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별이 내 하루를 바꿨다기보다, 별이 **내 하루에 숨 쉴 공간을 만든** 것 같았다. ---
며칠 뒤, 나는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탔다. 혹시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없었다.
대신, 버스 뒷좌석 쪽에 작은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교복 위에 후드를 걸치고,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정류장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날 때쯤, 아이가 가방에서 종이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아주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처럼. 아이의 손가락이 별의 꼭짓점을 눌렀다. 별이 아주 작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별을 접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아이는… 그 별을 아직도 받고 있을 거라고. 좋아하든 싫어하든, 부끄럽든 아니든. 받는다는 건, 어쩌면 그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나는 주머니 속 별 하나를 만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도 고개를 들었어요. 정말로요.’ 버스 창밖으로, 흐린 하늘 사이로 아주 잠깐 햇빛이 비쳤다.
그 빛은 별처럼 대단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충분히 알려 주었다.
오늘이 끝나도, 내일은 온다고. 그리고 누군가의 작은 마음이, 누군가의 하루를 살릴 수 있다고.
나는 그날, 회사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하늘을 조금 오래 봤다.